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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땅이 공짜?! - 대한민국 금융1번지 여의도 본문
여의도 땅이 공짜?! - 대한민국 금융1번지 여의도
여의도 땅이 공짜?! - 대한민국 금융1번지 여의도
안녕하세요!!
스노락스의 게으른 투자, 스노락스입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루보', '남해회사' 같이 거품주를 주로 다루었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머리도 식혀갈 겸 주식이 아니라 여의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1021500
금융권 취직을 꿈꾸는 이라면 누구나 가고싶어하는 곳, 여의도입니다.
여의도는 오늘날 국회의사당, KBS를 비롯해 각종 금융회사들이 모여있어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를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죠!
신문 기사나 뉴스에서 '여의도의 몇 배'라는 표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만큼 여의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역 중 하나라는 의미이겠죠.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만큼 아파트·상가 등은 서울 시내에서도 상당히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데요,
2018년 9월 21일 기준으로 성북구 장위동의 1㎡당 매매 시세는 546만원인 반면, 여의도의 1㎡당 매매 시세는 1162만원으로 두배 이상 차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 예시는 단순 비교를 위한 것으로 특정 지역을 비하할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립니다.
그런데 이런 여의도 땅이 옛날에는 '줘도 안 먹는 땅'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나닛?!
여의도(汝矣島)는 모래가 많고 장마 때마다 곧잘 물에 잠기곤 해 '너나 가져라'라는 뜻의 '너의 섬(汝矣島)'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근대 이전까지 여의도는 모래가 많았기 때문에 농사에 전혀 쓸 수 없는 쓸모없는 땅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섬에 양말산(羊馬山 - 현재 국회의사당 위치)이라고 불리는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었고,
섬이라는 특성 상 동물이 도망갈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정부는 여의도를 목장으로 사용했다고 하네요
여의도에 관한 기록1421년(세종 3년) 조선왕조실록, 1556년(명종 11년) 조선왕조실록, 1751년(영조27년) 도성삼군문분계총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원래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너벌섬이라고 불렸는데, 여의도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1751년(영조27년)부터라고 합니다.
조선 말 쓰여진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는 "여의도는 밤섬(栗島)과 서로 잇대어 있는데 큰 물이 나면 섬이 두 개로 나뉜다. 전에는 가축을 기르는 목장이었기 때문에 사축서(司畜署), 전생서(典牲署)의 관리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공항
이미지 출처 : http://www.tipti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77
일제 강점기 여의도는 비행장으로 사용됩니다.
1916년, 일제는 여의도에 있던 목장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비행장을 건설합니다.
당시 서울 주둔군이 배치됐던 용산 기지와 가깝다는 것이 이유였죠.
1920년 일본은 여의도 비행장에서 이탈리아와 일본의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의 방일 비행단이 로마부터 인도, 시암, 광동, 상해, 베이징을 거쳐 일본까지 16,000km의 거리를 3개월에 걸쳐 비행하는 행사였는데요, 한반도에 처음으로 서양비행기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이를 구경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비행장으로 몰렸다고 합니다.
일본은 청도(靑島)를 공격하면서 공군력의 중요성을 실감했었는데 모든 항공분야 기술과 시스템을 당시 동맹 관계에 있던 이탈리에서 도입했다고 하네요.
또 1920년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세계 1차 대전: 1914-1918년)이었기 때문에 1차 대전 주요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일본과 이탈리아는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917년 세계적인 곡예비행사 아트 스미스(Art Smith)가 곡예비행을 선보이기도 했고
1922년에는 안창남(한국의 독립운동가 - 한반도 상공을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알려져 있음)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여의도 일대에 5만여명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서울 인구는 27만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인지 감이 오시나요?
안창남 선생님은 고등학교 1학년(16세)이던 1917년 이곳에서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비행사가 될 것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광복 이후 여의도는 비행장의 기능을 상실합니다.
6.25 전쟁(1950-1953) 이 끝난 1953년, 국제공항의 필요성을 대한민국 정부는 여의도 비행장에 국제공항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장마철마다 지속되는 잦은 침수로 여의도 공항은 공항으로서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장마철만 되면 모든 직원들이 기자재와 함께 여의도를 빠져나와야 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1936년부터 김포 비행장(현 김포 국제공항)이 운영을 시작했기 때문에 여의도에 공항을 고집할 필요도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1958년 여의도공항은 민간 공항 기능을 김포공항으로 넘겨주고 공군기지 역할만 수행하게 됩니다.
이후 명맥만 이어오던 여의도공항은 1971년 2월 공군기지 기능까지 성남에 위치한 서울공항으로 넘기면서 폐쇄되기에 이릅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여의도는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1966년 7월, 한강의 범람으로 당시 인구 380만 명이던 서울에 4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홍수가 일어납니다.
거침없는 성격으로 '불도저'라고 불리던 김현옥 서울 시장은 다시는 한강이 범람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곧바로 한강 유역 백사장을 강변도로와 제방으로 바꾸는 대공사에 돌입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에는 한강 가운데에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를 세우겠다는 '한강개발 3개년 계획'까지 공개합니다.
한강변에 74km의 강변도로(현 윤중로)를 만들고, 여의도 둘레에 석축 제방을 쌓아 6층 이상의 빌딩만 들어서는 고층 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이었죠.
그 후로 6개월만인 1968년 6월 '줘도 안 먹는 땅' 여의도는 군사정부의 '한강 정복'을 상징하는 섬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미지 출처 :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110588
1968년 2월 한강 흐름을 방해하는 밤섬을 폭파하면서 본격적으로 여의도 개발이 시작됐습니다.
폭팔 잔해는 여의도 둘레 74km에 높이 15m 둑을 쌓는 윤중제(輪中堤 - 현 여의방죽) 공사 자재로 재사용했습니다.
김현옥 시장은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겨우 100일 만에 290만㎡ 규모의 인공대지 조성을 끝냈다고 합니다.
1968년 완공된 여의도 윤중제 전경 / 동아일보DB
이미지 출처 : http://bizn.donga.com/3/all/20170107/82218120/2
1969년 공개된 '여의도 종합개발계획'에 따르면 여의도는 '최첨단 수상도시'로 개발될 예정이었습니다.
서쪽 끝에 국회의사당이, 동쪽 끝에 서울시청과 대법원, 종합병원 등이 들어설 예정이었으며
마포에서 서울대교(현 마포대교), 영등포로 이어지는 6차선 고속도로가 도시의 중심 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보행로는 지상 7m에 설치해 교통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는 계획이었고 대형 공원도 곳곳에 배치했습니다.
이 계획은 서울의 구도심에 집중된 도시기능의 배분을 시도하면서 서울시 도시구조의 변화를 모색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지금은 서울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서울로7017의 완공일이 2017년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당시 공중 보행로를 통한 입체도시 건설은 시대를 50년이나 앞선 혁신적인 발상이었던 셈입니다.
1970년 4월 8일 붕괴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현장. 새벽 6시 30분 발생한 사고로 33명이 사망했다./국가기록원 제공
이미지 출처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92858951
하지만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은 없습니다.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붕괴 참사가 일어나면서 여의도 개발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1970년 4월 8일 철거민 이주를 목적으로 건설된 와우아파트 15동이 무너지면서 33명이 사망하고 4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와우아파트 참사는 부실한 설계, 부족한 공사대금, 무면허 사업자, 횡령의 콜라보로 이루어진 인재였기 때문에 김현옥 시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식은 사퇴였지만 사실상의 경질이었던 셈이죠.
김현옥 시장의 여의도 개발 계획은 양택식 시장이 뒤를 이어받으면서 전면 수정됩니다.
양택식 시장이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은 시범아파트 건설이었습니다. 날림공사 오명을 씻고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수정된 여의도 개발 계획에 따라 1971년 당초 대법원을 염두에 뒀던 부지에 당시 한국 최고층(13층)이던 시범아파트 24개 동이 들어서게 됩니다.
시범아파트에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엘리베이터, 중앙 집중식 난방 등이 설치되었으며,
여의도를 특별 학군으로 분류하는 조치를 단행해 고소득·고학력 계층이 여의도로 많이 이주했다고 하네요.
여의도 서울 아파트는 1980년 최초로 '억대 아파트'시대를 연 아파트이기도 합니다.
김현옥 시장의 여의도 개발 계획에 치명타를 날린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여의도 중앙에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현 여의도공원)을 만들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죠.
이 공원은 여의도를 동서로 두 동강 내며 김현옥 시장의 도시 계획 마스터플랜을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여의도 개발의 실무 책임자였던 故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1970년 10월 말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 광장이 '전시 비행장'임을 알게 된 것은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제야 양(택식) 서울시장 이마처럼 훤하게 포장만 하라'는 속뜻을 알 수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973년 신축 공사 중인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 국회사무처 제공
이미지 출처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92858951
1970년대 중반, 국회의사당 이외에는 아무것도존재하지 않았던 여의도에 핵심 기관들이 속속 입주하기 시작합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1973년), 국회의사당(1975년 완공), 우체국(1975년), 한국노총회관(1975년), KBS(1976년), 한국화재보험협회(1977년), 한국교직원공제회(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1979년), TBC(1980년), MBC(1982년), SBS(1990년) 등 공기업과 방송사들이 여의도로 모여들었으며 대법원과 종합병원 부지로 점찍어 두었던 동쪽 끝 부지에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63빌딩(1985년)이 들어서게 됩니다.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은 1978년 화재보험협회빌딩에 자리잡았고,
증권거래소는 동양 최대 입회장을 갖춘 사옥을 준공하며 1979년 7월부터 여의도로 자리를옮깁니다.
주로 명동에 자리를 잡고 있던 증권사들은 이때부터 서울대교(현 마포대교)를 오가며 업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증권사들이 곧바로 감독원과 거래소를 따라 본사를 여의도로 이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0년 경성주신현물취인소가 들어선 이후 금융중심지 역할을 맡아온 명동에서의 증권거래 주문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여의도를 능가했으니 기업들로서는 이전을 검토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1979년 증권거래소 별관에 입주하는 방식으로 일찌감치 본점이나 지점을 낸 국일(현 KB), 신흥(현 현대차) 등 중소형 증권사들은 '식당도 없고 정보도 얻기 힘든 고도(孤島)'라고 투덜거렸다고 하네요.
여전히 많은 이용객들이 명동을 찾았고 여의도는 돈을 모으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는 풍수지리적 해석이 더해지면서 기업주들은 여의도로의 이전을 꺼렸습니다.
당시 증권사 사이에서는 '금새 허물어질 수 있는 모래밭에 바람도 센 땅이라 돈을 모으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풍수적 해석과 '주색(酒色)의 기운이 강해 망신살을 경계해야 한다'는 명리학적 해석이 떠돌았습니다.
이런 해석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의도로 이전한 뒤 주인이 바뀌거나 슬럼프에 빠진 기업도 적지 않습니다.
NH투자증권(LG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NH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쌍용증권-외국계-신한금융투자)는주인이 자주 바뀌었고,
유안타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은 동양사태(사기성 CP발행으로 수많은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로 존폐위기를 맞으면서 여의도 사옥을 팔고 명동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일찌감치 여의도에 자리잡은 국회는 여의도로 이주하려는 기업에 텃세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입지와 주변 경관을 중시한 국회는 주변에 사옥을 지으려는 기업들에게 의사당보다 낮은 층고를 강요했습니다.
오늘날 여의도가 여의도공원을 경계로 '동고서저'의 형태를 띄게 된 데에는 국회의 간섭 때문이었던 것이죠.
이미지 출처 : http://realestate.daum.net/news/detail/main/MD20160623075006678.daum?isMobile=false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금융기관들은 여의도로의 이전을 검토하게 됩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물가)로 대한민국 경제가 자신감을 가지던 시기였습니다.
국민소득(GDP)은 김현옥 시장이 여의도 개발을 계획하던 시기 279달러에서 1989년 5,736달러로 20배가 넘도록 성장했습니다.
1988년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한 한국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경기 호황을 타고 덩치를 불린 금융계는 업무 효율성을 높일 목적으로 너나할것 없이 여의도로 몰려듭니다.
여의도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 입니다.
1993년 한국투자신탁(현 한국투자증권)을 시작으로 대한투자신탁(하나금융투자), 유화, 동양(유안타), 서울(유진투자), 보람(하나금융투자), 제일(한화투자), 선경(SK), 쌍용증권(신한금융투자) 등이 여의도광장 인근 제2 증권타운에 모여들었죠.
이후 여의도는 지금까지도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며 대한민국 금융 1번지의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2010년대 여의도는 금융, 정치 중심지에 문화 중심지 역할까지 가져가고 있습니다.
매년 10월마다 서울세계붗꽃축제를 개최하며 밤하늘을 색색이 수놓을 뿐만아니라
밤도깨비 야시장, 봄꽃축제 등 여러가지 문화행사들이 여의도에서 치뤄지고있습니다.
또 박원순 시장은 "여의도를 통으로 재개발할 것"이라며 "공원과 커뮤니티 공간을 보장하면서 건물의 높이는 높일 계획을 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여의도를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재단장할 의지를 내보이기도 했었습니다만..
안 그래도 비싼 땅값을 더 올리기만 한다는 반대 여론에 휘말려 이내 개발 무기한 보류를 선언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역동적인 변화를 이뤄낸 여의도!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신을 계속할지 기대가 됩니다.
TMI로 한국의 증권중개 업무는 한국거래소의 여의도 거래소 지점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장내증권매매의 처리속도는 여의도에서 가장 빠르며, 여의도에서 멀어질수록 느려진다고 하네요!
이번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포스팅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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